1. '보이지 않는 손'의 위대한 탄생 (자유방임시장의 예언자, 아담 스미스)
- 아담 스미스의 공짜 여행
- 자유방임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 국부론의 산실, 글래스고대학
- '보이지 않는 손'은 공평하지 않다.
- 상인과 제조업자들을 믿지 말라
- 아담 스미스의 인간적 면모와 그의 사상이 남긴 것
아담 스미스의 공짜 여행
18세기 영국에 '찰스 타운젠트'라는 사람이 있었다. 한때 재무장관 자리에까지 오른 것을 보면 학식과 재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상류사회에서 제법 발이 넓은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재산이 아주 많은 귀족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델카이드 백작 부인이라는 돈 많은 미망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이 귀부인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왔다. 타운젠트는 이 귀공자를 유럽에 보내 견문을 넓히도록 했다. 물론 이러한 수학여행은 당시의 지체 높은 영국의 귀족 가문에서 유행하던 자녀교육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타운젠트는 많은 재산과 높은 학식, 그리고 고귀한 신분과 지위에 어울리지 않는 괴팍한 성격을 가진 탓으로 상류사회에서 존경받는 인격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아내가 데리고 온 귀공자의 여행 수행 가정교사를 제대로 고른 것을 보면 사람 보는 눈만은 매우 정확했던 듯하다. 당시 글래스고대학에서 도덕철학을 강의하던 실력 있는 교수를 가정교사로 지목한 것이다. 경제사상사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타운젠트의 이름이 오늘날까지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그 도덕철학 교수가 다름 아닌 '경제학의 창시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였기 때문이다.
41세의 대학 교수와 귀공자는 1764년 1월 런던을 떠나 약 3년 동안 프랑스의 여러 도시를 여행했다. 엄청난 비용이 든 프랑스 여행에서 그 귀공자가 무엇을 배웠는지, 그리고 그러한 배움을 밑천삼아 영국 사회나 인류 문명의 발전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대학 교수 스미스는 다르다. 그는 이 공짜 여행을 충분히 활용했다. 18세기 유럽의 지식인 사회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합리주의 사상의 대가들을 만나고 프랑스의 산업 발전과 정치,경제적 변화를 직접 목격했다. 그는 파리와 마르세이유, 남부 프랑스의 학문 중심지 툴루즈 등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데이비드 흄, 튀르고, 달랑베르, 콩디악, 기본, 케네 등의 쟁쟁한 사상가들과 사귀었다.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볼테르와 만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을 출간한 철학자로서 이미 만만치 않은 명성을 얻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온 젊은 공작의 선생이라는 높은 지위까지 겸비한 덕분에 파리 귀부인들의 살롱에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그는 졸지에 파리 사교계의 총아가 되어 고귀한 여인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경험이 후일 <국부론>(An Ing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을 집필할 때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타운젠트가 스미스를 매우 후하게 대접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여행 수행 가정교사를 하는 동안 스미스는 3백 파운드의 연봉을 받았는데, 이는 당시 글래스고대학 교수 연봉의 두 배에 육박하는 고액이었다. 게다가 타운젠트는 스미스가 임기를 마친 후에도 평생 동안 3백 파운드의 연금을 지급했다. 부잣집 아들이 아니었던 아담 스미스가 평생 동안 연구와 집필에 몰두할 수 있었던 데는 연금이 실제로 큰 기여를 했다. 스미스는 1766년 11월 프랑스 여행을 마쳤는데 젊은 귀공자의 동생이 일행에 합류했다가 파리의 노상에서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해 봄 고향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본격적인 학문 연구를 시작했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1776년, 스미스는 성서 이래 가장 중요한 문헌이라고까지 하는 <국부론>을 출간했다. 대영제국이 가장 거대한 식민지를 잃어버린 아메리카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석 달 전에 출간된 이 책은 대서양 건너가 아니라 영국 땅 자체에서 탄생한 신세계를 그려 보였다. <국부의 성질과 원인에 관한 연구>라는 따분한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초판 1천부가 반년 만에 매진되었다. 이것은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당시 출판계에서는 놀라운 판매 실적이었다.
아담 스미스의 사상은 매우 방대한 것이어서 한 마디로 평하기가 곤란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사상이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서는 혁명적이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가장 보수적인 자본가와 정치가들이 자기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걸핏하면 스미스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을 생각하면 이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가 바뀐 탓이지 스미스의 사상이 보수적인 탓은 결코 아니다. 스미스는 자의적이고 불합리한 각종의 법률과 규제를 통해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고 사회적 진보를 가로막고 있던 중상주의정책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 자유방임 시장경제, 즉 자본주의 경제질서의 필연적 승리를 예언했다. 영국 사회가 이미 새로운 체제로 이행했으며, 아무도 그러한 신세계의 도래를 막을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이다.
이제 스미스가 발견한 신세계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자유방임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아담 스미스는 가장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 속에서 진리를 끄집어냈다. 지금이라도 번잡스런 시장통에 나가기만 하면 누구나 스미스가 보았던 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무엇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도 계획하거나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필요를 느끼는 모든 종류의 재화와 서비스가 공급되고 소비된다는 사실이다. 노예를 시켜 이런저런 재화를 생산하게 하는 노예 소유자도 없고, 농노들로 하여금 한 주일에 며칠씩 자신의 장원에서 일하게 하는 봉건영주도 없으며, 아들이 아버지의 신분과 직업을 이어받아 각종의 산업에 종사케 하는 낡은 관습의 힘도 사라졌고, 어떤 재화를 얼마만큼 생산할 것인지 결정하고 그에 따라 사람을 배치하는 중앙정부의 계획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적절한 때, 적절한 양만큼 생산되어 적절한 가격에 판매된다. 예컨대 천만 명의 인구가 밀집된 도쿄나 서울, 혹은 뉴욕 같은 거대도시에서 매일 아침 소비자의 대문 앞에 신선한 우유가 배달되는 데에는 낡은 관습이나 명령 따위는 불필요하다. 사람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돈만 가지면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사실뿐이다. 이것은 마치 숨을 쉬는 일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사람들은 어째서 자기가 원하는 물건이 동네 구멍가게나 슈퍼마켓 또는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는지 의문을 품는 법이 없다. 그러나 인간이 이와 같은 사회에서 살게 된 것은 겨우 2백~3백 년 전부터이다.
아담 스미스가 발견한 신세계는 바로 이런 세상이다. 그는 신분제도에 근거를 둔 낡아빠진 관습이나 중앙정부의 계획 또는 명령 없이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재화나 서비스가 생산되고 거래되고 소비됨으로써 사회가 사분오열되지 않는 이유를 체계적으로 설명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그가 경제학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이 때문이다. 스미스는 자신의 신세계를 유지하는 기본원리를 '자유방임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이라고 설명했다. 이것은 <국부론>에서 제시된 스미스의 사상 가운데 가장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핵심 내용이다. 스미스는 이기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백정이나 양조업자나 제빵업자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기의 이익에 대한 그들의 관심 덕택에 식사를 기대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의 인도주의가 아니라 자애심에 호소하며,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하지 않고 그들 자신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모든 사람들이 애국심이나 박애정신보다 자기의 이익을 더 귀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제조업자와 상인은 더 높은 이윤을 원하고, 노동자는 임금을 올리려고 하며, 농민들은 후한 값에 농산물을 처분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것이 스미스가 말하는 신세계의 전모는 아니다. 만약 이것이 전부라면 스미스의 신세계는 금방 욕심쟁이와 사기꾼들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 것이다. 그의 신세계는 사람들이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지 못하게 다스리는데, 그 방법은 다름 아닌 '시장에서의 경쟁'이다.
어떤 욕심 많은 구두장수가 주체할 길 없는 이기심에 이끌려 구두값을 두 배로 올렸다고 하자. 다른 모든 구두장수들이 똑같이 하지 않는 한 그는 자기의 고객을 모두 경쟁자에게 빼앗기게 될 것이므로 조만간 값을 도로 내리든가 아니면 파산을 감수해야 한다. 상품시장뿐만 아니라 노동시장이나 화폐시장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역시 지나친 이기심에 사로잡힌 섬유회사 사장이나 은행가가 종업원의 봉급과 고객의 예금이자를 반으로 깎아 버렸다고 해보자. 종업원들이 다른 회사로 일자를 옮기고, 고객들이 거래처를 다른 은행으로 바꾸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중학교 수준의 사회교과서에 나오는 일물일가의 법칙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다. 스미스의 자유시장은 상품의 가격과 아울러 생산량까지도 한꺼번에 결정해주는 해결사이다.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산과 소금 두 가지만을 생산하는 경제를 가정해 보자. 그리고 어떤 원인에 의해서 소비자들이 지금 생산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우산을 원하고 소금을 더 적게 원한다고 하자. 그러면 우산값이 올라가고 소금값은 내려가서 우산공장 사장은 한몫을 잡고 소금공장 사장은 적자를 볼 것이다. 그러면 우산공장 사장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종업원을 더 많이 고용하게 되고 소금공장 사장은 반대로 할 것이다. 소금공장을 집어치우고 우산 생산에 새로 투자하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이리하여 우산의 공급이 늘고 소금 공급이 줄면 우산값은 다시 내려가고 소금값은 올라갈 것이다.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스미스의 자유시장은 상품의 가격과 아울러 그 상품이 얼마나 생산되어야 하는지 까지도 한꺼번에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자유시장의 역할이 여기에서 멈추는 것은 결코 아니다. 스미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유시장이 개인의 이기적 욕망을 '국부의 증진'이라는 사회 전체의 공동선으로 이끄는 '보이지 않는 손'의 축복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용주가 얻는 이윤의 크기는 산업 생산물의 가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자본을 투자하는 것은 오로지 이윤을 얻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고용주는 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가지거나 가능한 한 많은 화폐량으로 교환될 수 있는 산업에 투자할 것이다. 따라서 각 개인이 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최대한 노력할 때 필연적으로 그 사회의 연간 생산물을 최대화하기 위해 일하게 된다. 사실 그는 사회 일반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얼마만큼 그것을 증진시키는지도 알지 못한다.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한다. 그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의도하지 않았던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회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오히려 그렇게 하려고 했을 때 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이다.
자유방임적 시장이 개인의 이기적 욕망 추구를 국부의 증진이라는 사회적 공동선으로 이끈다는 것은 스미스의 신념이었다. 그는 이것을 일컬어 "단순 명백한 자연적 자유의 질서"라고 했다. 스미스의 이러한 생각은 사상사적으로 대단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국부론>이 출간된 이후 산업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나 간섭 또는 규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스미스를 끌어다 댔다. 정부는 제멋대로 굴지 말고 스미스의 충고에 따라 '작은 정부' 또는 '값싼 정부'가 되기 위해 근신하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정부가 "단순 명백한 자연적 자유의 질서"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임무만을 담당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가 제시한 정부의 역할은 다음 세 가지뿐이다.
첫째, 다른 독립된 사회의 폭력이나 침략으로부터 사회를 보호하는 것,
둘째, 사회 구성원들의 불의나 억압으로부터 다른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는 일 또는 엄정하게 법을 집행하는 일
셋째 ,공공사업과 공공기관을 세우고 유지하는 일
스미스의 자유시장은 칭찬받을 만한 장점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무결한 만능의 해결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스미스의 신세계는 자유시장의 결함으로 인해 숱한 시련을 겪었다. 우리는 자유시장의 결점과 그로 인한 신세계의 시련에 대해서 뒤에서 충분히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일단 스미스의 업적에만 주의를 기울이기로 하자.
스미스가 살았던 18세기 후반은 아직 산업혁명이 본격화되지 않았던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의 시대였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초기단계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스미스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그 기본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스미스가 명석한 두뇌와 천재적인 통찰력을 지닌 비범한 인물이었음을 입증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점은 스미스가 그 일을 해내기에 가장 유리한 환경에서 살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위대한 사상은 시대와 상황의 산물인 법이다. 아담 스미스의 사상 또한 예외는 아니다.
<국부론>의 산실, 글래스고대학
아담 스미스는 1723년 스코틀랜드 커콜디에서 태어났다. 커콜디는 스코틀랜드 동해안의 작은 마을로서 그 일대는 소금, 못, 석탄 등의 제조업과 광업이 발달한 발트해 무역의 중심지였다. 스미스의 어린 시절은 불행의 요인을 안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렇게 불행하지는 않았다. 커콜디 세관 검사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스미스가 태어나기 두 달 전에 사망했다. 그래서 스미스는 아버지의 이름 '아담'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아버지 아담은 상면조차 못한 아들에게 많지는 않지만 정상적인 교육을 받는 데는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그는 아마 자기가 남긴 유산으로 공부한 아들이 관세에 반대하고 자유무역을 옹호하는 것을 보고 조금은 서운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들 아담이 나중에 연봉 6백 파운드의 스코틀랜드 세관 감독관이 되었으므로 결국은 위안을 받았을 것이다.
스미스는 평생의 벗이자 헌신적인 어머니였던 마거릿 더글러스의 슬하에서 순탄하게 성장하여 커콜디 시립학교에 들어갔다. 고전과 수학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모범생 스미스는 열네 살 되던 1737년에 명문으로 손꼽히던 글래스고대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3년 후에는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옥스퍼드 발리올 칼리지로 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스미스는 6년 만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지도 않고 도중하차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버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옥스퍼드의 학문 풍토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후일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옥스퍼드대학 교수들은 몇 해째 가르치는 시늉조차 아예 그만 두었다."고 비난하고 대학에도 시장법칙을 도입하여 청강생의 수에 따라 교수 봉급을 결정하자는 과격한 제안까지 내놓았다. 아마도 당시의 옥스퍼드에서는 요즈음과 달리 매우 나태하고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스미스가 기숙사에서 근대합리주의 철학의 거두이며 경험론의 선구자인 데이비드 흄의 <인성론>(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탐독하다 적발되어 책을 압수당하고 야단을 맞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스미스는 "발리올을 혐오하면서 그 곳을 떠났다," 그리고 옥스퍼드대학은 성서 이래 가장 중요한 문헌인 <국부론>에서 옥스퍼드를 비난한 것을 괘씸하게 생각했는지 스미스가 학자로서 크나큰 명성과 사회적 존경을 얻은 이후에도 박사학위를 주지 않았다.
스미스는 고향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독서로 소일했다. 그러던 중 그는 학자로서 명성을 떨칠 기회를 잡았다. 그것은 1748년 에딘버러대학에서 개설한 겨울 공개강좌였다. 그는 이 강좌에서 문학과 법학을 강의하여 청강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모교 글래스고대학의 도덕철학 교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독립된 분야인 경제학은 그의 도덕철학 강의의 일부분이었다. 스미스는 혐오스런 발리올의 기억을 거울삼아 열심히 연구하고 강의하여 성실한 자세와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대학의 재산 관리와 도서 구입을 책임지는 출납관에 이어 글래스고대학 부총장에까지 오른 것도 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는 1759년 <도덕감정론>을 출간함으로써 영국 상류사회와 유럽 다른 나라 지식인 사회에 이름이 알려졌다. 앞에서 등장했던 찰스 타운젠트도 그 이름을 들었다. 그래서 스미스는 프랑스 여행의 기회를 맞이했다.
스미스는 당대의 사회적 난제와 맞대결하는 진취적 자세를 가진 학자였으며, 또한 경제학자로서 매우 유리한 환경에서 살았다. 18세기 중반의 글래스고는 철강, 피혁, 도기, 견직물 등의 제조업이 크게 번창한 데다 영연방의 식민지였던 아메리카와 유럽 각국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글래스고의 인구는 스코틀랜드의 다른 지역에 비해 3~4배 빠르게 증가했지만 글래스고는 거지가 없고 아이들까지 바쁜 도시였다. 스미스는 그 곳에서 나날이 성장해 가는 자유시장의 위력을 누구보다 잘 볼 수 있었다.
글래스고대학의 자유롭고 진취적인 기풍 또한 그에게는 일종의 행운이었다. 이 대학의 분위기를 전해주는 하나의 일화가 있는데, 그것은 산업혁명의 심장 역할을 한 증기기관의 발명자 제임스 와트와 관련된 것이다. 글래스고 출신이면서 런던에 가서 수학기구 제작기술을 익힌 와트는 1758년 고향에 와서 개업을 하려 했는데 그곳의 동업조합, 즉 길드(Guild)가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글래스고에서 7년 이상 도제생활을 한 자가 아니면 개업할 수 없다는 길드의 규칙이 그 근거였다. 상심한 와트를 구해준 것은 바로 글래스고대학이었다. 이 대학은 그에게 학교의 천문기구 수리를 맡기고 작업실을 내주었다. 대학은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길드도 이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도덕철학 교수 스미스는 종종 와트의 작업실에 들러 대화를 나누었다. 결국 와트는 글래스고대학이 수리를 의뢰한 구식 엔진을 손보다가 착안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1769년에 새로운 증기기관의 특허를 따냈다.
그러나 스미스가 무엇보다 중요시한 것은 자기의 시대가 당면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해결하려는 학자로서의 자세였다. 스미스는 학자들 사이의 추상적인 논쟁이나 학생들에 대한 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국을 운영하는 올바른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연구하고 집필했다. 그는 당시의 사회체제를 뒤집어엎으려는 혁명적인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의 관심은 나라의 부 전체를 증진시키는 원리를 찾아내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 같은 관심은 불가피하게 스미스의 사상이 진보적인 색채를 띠게 만들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공평하지 않다.
스미스는 우선 당시의 정부 각료들과 수많은 철학자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던 낡은 편견과 대결했다. 그 낡은 편견이란 중상주의와 중농주의를 의미한다. 스미스는 <국부론>의 첫머리에서 부는 "그 사회의 모든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이라고 규정하였다.
국민들의 연간 노동은 원래 그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모든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을 공급하는 자원이며, 그 생필품과 편의품은 언제나 이러한 노동의 직접적인 생산물이거나 그 생산물로 다른 국민들에게서 구입한 물품이다.
이것은 우선 중상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중상주의에 의하면 국부의 크기는 그 나라가 보유한 금과 은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당시 유럽 여러 나라의 정부는 국부를 증진시킨다는 명목으로 관세와 규제 조치를 통해 수입을 억제하고 장려금제도나 식민지 건설을 통해 수출을 촉진시켰다. 이러한 정책은 그 나라의 소비자를 희생시키면서 상인과 제조업자에게만 막대한 이득을 안겨 주었다. 스미스는 국부를 모든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으로 규정함으로써, 마치 금,은의 축적이 생산의 목적인 양 간주하는 중상주의 사상의 근거를 무너뜨렸다. 아울러 그는 상공업은 이미 생산된 부를 이리저리 굴려대는 데 불과하고 오직 농업만이 부를 생산한다는 중농주의자들의 오류를 지적했다. 스미스는 글래스고의 크고 작은 공장에서 '부'가 매일매일 생산되는 것을 직접 본 사람이다. 그는 해마다 생산되는 부의 크기가 그 사회에서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와 노동시간, 그리고 노동의 일반적인 숙련도와 기술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이처럼 노동하는 모든 사람이 부를 창조하며, 왕실이나 귀족, 상인과 자본가의 금고에 쌓이는 금,은이 아니라 그 사회의 모든 사람이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에 의해 국부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는 스미스의 견해는, 비록 완전무결하지는 않지만 분명 진보적인 철학의 표현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스미스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큰 기득권을 가진 자본가들과 가장 보수적인 정치가 또는 사상가들의 스승이고 수호신이다. 그가 묘사한 경쟁적 자유시장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그의 사상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하나의 신앙으로까지 격상되었다. 거대 독점기업을 소유하고 시장을 지배하면서 가격을 제멋대로 조작하는 재벌기업의 총수들도 모두 스미스의 숭배자들이다. 정부가 통화량과 이자율을 통제하고 때로는 임금 결정에까지 간섭하며, 수출산업과 농업에 막대한 보조금을 쏟아 붓고 방대한 재정 지출을 통해 경기를 조절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일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경제학자와 정치가와 공무원들도 거의가 자칭 스미스의 사상 가운데 사회적 조화를 강조하는 대목만을 뽑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버린 탓이다. 자신이 보수적인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적 대변인으로 취급받는 것을 알면 아마도 스미스는 저 세상에서 크게 화를 낼 것이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스미스 자신의 책임도 없지 않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18세기에도 이미 자유방임시장이 완전한 사회적 조화를 이끌어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도처에서 드러났고, 스미스 자신도 이런 점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18세기 중반의 영국으로 돌아가 보자. 그 곳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손'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무수히 존재하고 있었다.
18세기 영국 인구는 어림잡아 1천 2백만 명 정도였는데 그 중 빈민들의 수는 2백만 명에 육박했다. 이 빈민들은 대부분 조상 대대로 살던 땅에서 쫓겨나 도시로 흘러 든 농민들이었다. 모직물 공업의 발전으로 양모에 대한 수요가 늘자 지주들은 농민들을 몰아내고 울타리를 친 다음 그 땅에 양을 풀어 놓았다. 물론 지주들은 그 이전에 비해 몇 배의 소득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지주들은 매우 자상했던 보이지 않는 손이 농민들에게는 매우 가혹해서 삶터를 빼앗긴 농민들을 비정한 공업도시의 한가운데로 던져 버렸다. 새로 발명된 기계 때문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수공업자들 역시 마찬가지 운명에 처했다. 그들은 하루 6펜스짜리 일자리조차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도시의 뒷골목은 빈민과 실업자로 넘쳐 나 임금은 오를 수가 없었다. 작가 다니엘 데포가 18세기 중엽에 럼부 형제가 세운 유명한 공장을 둘러보고 다음과 같이 개탄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1분 동안 수차 바퀴가 세 번 도는데 한 번 돌 때마다 2만6천5백86개의 기계장치가 9만7천7백46회 움직여 7만3천7백26야드의 견사를 뽑는다.
이 공장에서 특기할 만한 일은 나이 어린 직공들이 열두 시간이나 열네 시간씩 교대로 일하면서 24시간 내내 기계를 돌렸고, 먼지투성이 보일러 불에 밥을 짓고, 사람의 체온으로 늘 따뜻하게 유지된다는 바라크 속에서 교대로 잠을 잔다는 사실이다.
공장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산업혁명의 동력원인 석탄을 캐는 탄광에서는 반나체의 남녀가 뒤섞여 일했고, 열 살 미만의 어린이들까지 이름뿐인 품삯을 받는 대가로 햇빛도 들지 않는 막장에서 부모를 도와 일했다. 임산부가 석탄차를 끄는 모습이나 막장 안에서 해산하는 광경조차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시의 신흥 자본가들은 신세계의 도래를 예찬했고 시골의 지주 역시 흥청망청 사치를 즐겼다. 이발사 출신의 리처드 아크라이트는 획기적인 방적기를 발명한 덕택에 50만 파운드의 재산을 모았고, 대장장이 사무엘 워커는 자기의 대장간 자리에 20만 파운드짜리 철강공장을 세웠다. 참으로 기괴하고 무질서한 사회였다.
아담 스미스는 그 괴상하고 무질서한 광경에서 보이지 않는 손의 존재를 감지했고 이기심과 경쟁이라는 시장의 법칙을 찾아냈다. 그의 철학은 근본적으로 조화론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스미스는 자기 철학의 노예는 아니었다. 그는 자기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화롭지 않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소수만이 점점 더 부유해지고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을 겪는 현실이 이 철학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스미스는 "수많은 백성이 가난하고 비참하게 사는 한 그 사회는 결코 행복하거나 번영하는 사회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이런 말을 과감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겸손함과 빈민에 대한 따뜻한 동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국부론>에서 "철학자는 천재가 아니며, 철학자와 지게꾼의 차이는 마스티프 개와 그레이하운드 개의 차이의 절반도 안된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타고난 능력은 별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타고난 재능의 차이는 사실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적다. 예컨대 철학자와 평범한 지게꾼처럼 가장 상이한 인물들 사이의 차이도 타고난 것이 아니라 관습과 교육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 세상에 태어나 여섯 살이나 여덟 살이 될 때까지는 서로 비슷하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 문제를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그는 역사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였으므로 사유재산권의 유래에 대해 좀 더 철저히 따져 볼 수도 있었을 것이고, 만약 그랬더라면 과격한 혁명사상의 창시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미스는 일단 사유재산권을 기정사실로 인정한 상태에서 자유시장이 결국은 대중을 빈곤으로부터 건져 낼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고 말았다. 그의 희망은 다름 아닌 노동의 분업화, 특수화로 인한 생산력의 발전으로서 다음과 같이 <국부론>에 묘사하였다.
한 사람은 철사를 잡아 늘이고, 두번째 사람은 철사를 펴고, 세번째 사람은 그것을 끊고, 네번째 사람은 끊어진 철사를 뾰족하게 만들고, 다섯번째 사람은 못대가리를 붙일 자리를 만들기 위해 한쪽 끝을 간다. 못대가리를 만드는 데도 두세 가지의 다른 작업이 필요하다. 못대가리를 붙이는 일과 못 전체를 희게 만드는 일, 그것을 포장하는 일까지도 모두 하나의 독립된 특수 작업인 것이다.
이리하여 못 제조라고 하는 중요한 업무는 약 열여덟 가지의 개별작업으로 분할되어, 어떤 공장에서는 거의 전부가 모두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들은 대단히 가난하고 기계설비도 충분하지 않지만 있는 힘을 다해 일하면 약 10명의 직공이 하루 4만8천 개 이상의 못을 만들 수 있다. 따라서 한 사람당 하루 4천8백 개를 제조한 셈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따로따로 작업하고 아무도 이 특수 업무에 대해 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그들은 분명 한 사람당 하루 스무 개의 못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며 어쩌면 단 하나도 만들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담 스미스는 모든 산업의 영역에서 생산업자들이 경쟁자들을 누르기 위해 좀 더 적은 비용이 드는 생산기술과 방법을 도입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생산의 분업화와 특수화의 수준을 그 나라의 문명 발전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평가하고, 이것이 인간 사회를 더 큰 풍요와 번영으로 인도할 것으로 믿었다.
문명화되고 번영하는 나라의 보통 직공이나 하루벌이 노동자의 가재도구를 보라. 그러면 아무리 조금씩이라도 이 가재도구를 조달하기 위한 노동에 종사한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하루벌이 노동자가 입고 있는 모직 윗도리는 외견상 아무리 볼품없다 할지라도 양치기, 양모 선별공, 염색공, 방적공, 직포공, 표백공, 완성공 등의 수많은 사람들의 기술을 결합하지 않으면 만득 수 없다. 그밖에도 대단히 먼 곳에 사는 다른 노동자에게 원료를 수송하는데 얼마나 많은 조선공, 선원, 돛 제조공, 밧줄 제조공이 일했는가? 그가 입고 있는 싸구려 내의 신발, 그가 누워 자는 침대, 음식물을 만드는 부엌의 화로, 석탄, 주방기구, 식기, 나이프와 포크 이러한 모든 것을 점검하고 하나하나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노동이 사용되었는지 따져 보면, 문명국가의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가장 평범한 가재도구를 제공하는 데조차 수천 명의 도움과 협업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부자의 사치에 비하면 그의 가재도구는 극히 단순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한 왕후의 가재도구가 부지런하고 순박한 농민의 가재도구보다 얼마나 더 좋든, 그 농민의 가재도구도 일만 명의 벌거벗은 야만인의 생명과 자유를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아프리카 제왕의 것과 비교하면 훨씬 더 낫다는 것이 진실이리라.
요컨대 자유방임시장이 당장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해주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문명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걸리겠지만 결국은 사회 맨 밑바닥의 가난한 이들조차 언젠가는 자유방임시장의 혜택을 입게 되리라는 것이 스미스의 소신이자 희망사항이었던 것이다.
상인과 제조업자들을 믿지 말라
아담 스미스의 신세계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크게 매력적이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부자들을 편애한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민경제의 성패가 자기 어깨에 달린 것처럼 행세하는 경제인들, 즉 대자본가들이 알면 매우 섭섭하게 생각할 일이지만, 스미스는 사업하는 사람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공의 이익을 도둑질하여 자기 호주머니를 불리려 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정부에 대해서는 그들을 믿지 말라고 충고했다.
같은 업종의 사업가들이 오락을 즐기거나 기분 전환을 위해 모이는 경우에서조차도, 그들 사이의 대화는 결국 공중의 이익을 해치는 음모나 가격을 올리려는 모종의 책략으로 모아진다.
어떤 부문의 상인 또는 제조업자의 이익은 어떤 면에서 공공의 이익과 다르며, 때로는 반대되는 경우까지 있다 경쟁을 제한하는 것은 언제나 업자들에게 이익이 된다 그러므로 이 계급이 제출하는 상업에 관한 어떤 새로운 법률이나 제안도 주의 깊게 검토한 후가 아니면 채택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공중을 속이고 억압하는 것까지 그들에게 이익이 되고, 또 이제까지 그런 짓을 해온 계급에서 나온 제안이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또한 생산된 부의 분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계급투쟁에 주목했다. 그는 자신의 신세계에서 계급투쟁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양상을 냉정하게 분석했다. 물론 스미스는 두 진영 가운데 한편을 옹호하지는 않았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그는 가난한 사람의 대변인이 아니었지만 동시에 부자의 앞잡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당시의 계급투쟁을 묘사한 것을 보면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일상사를 처리하는 위원회에 불과하다."는 [공산당선언]의 한 귀절을 저절로 떠올리게 된다.
어느 곳에서나 임금은 그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두 집단 사이의 계약에 의해 결정된다. 노동자들은 가능한 한 많이 받으려 하고 사용자는 최소한으로 주려 한다.
그러나, 보통의 분쟁에서 어느 쪽이 유리한 지위에서 상대방을 자기의 조건에 따르도록 만들 수 있는가를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용자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훨씬 손쉽게 단결할 수 있다. 또 사용자들의 단결은 법률적으로 정당하거나 최소한 금지되지 않는 반면 노동자들의 단결은 금지된다. 의회는 임금을 낮추기 위해 단결하는 행위를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모든 분쟁에서 사용자들은 좀 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다. 지주, 농업자, 공장제 수공업자, 상인들은 이미 벌어 놓은 재화로 한두 해는 견딜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일자리가 없이는 대부분 일 주일도 버티지 못하며, 한 달 버틸 사람은 별로 없고, 일 년을 버틸 자는 거의 없다 사용자들은 임금을 올리지 않기 위해 언제 어디서나 암묵적이지만 일사불란한 단결태세를 갖춘다. 그들은 종종 특별히 단결하기도 하다. 이러한 행위는 항상 실행되는 순간까지 매우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이루어져, 아무런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굴복한 노동자들에게는 뼈아픈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 소문도 듣지 못한다. 그러나 그런 단결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자기방위적 단결은 언제나 시끄럽다. 그들은 필사적이다. 굻어 죽든가 아니면 사용자로 하여금 자신들의 요구를 즉각 받아들이도록 위협해야 하는 필사적인 싸움에서 그들은 어리석고 방종스럽게 행동한다. 이럴 경우 사용자들은 즉각 상대방을 강력하게 비난하면서, 치안판사가 나서서 하인, 노동자, 직인들의 단결행위를 탄압할 목적으로 제정된 가혹한 법규를 시행하라고 요구한다. 노동자들의 단결은 보통 아무런 성과도 없이 주모자들이 처벌받고 파멸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여기서 스미스는 생산된 부의 분배과정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투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고, 부와 권력을 가진 자본가계급이 한층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명백히 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아담 스미스가 발견한 훌륭한 신세계는 결점 없는 파라다이스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주의 정부의 불합리하고 자의적인 전횡에 맞서 합리성과 질서의 필연적인 승리를 예언하는 세계관의 일대 전진이었다. 이기심과 경쟁의 상호작용이 사회를 이끌어 간다는 것을 지적한 사람은 스미스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시장이 어떻게 사회를 유지시키는가를 전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나라의 부와 대중의 생활을 발전적으로 촉진시키는 이론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아담 스미스의 인간적 면모와 그의 사상이 남긴 것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을 저술한 이후 철학자, 사상가, 경제학자로서 최고의 명성과 영예를 누렸다. 그는 찰스 타운젠트가 지급하는 3백 파운드의 연금에다 스코틀랜드 세관 감독관 연봉 6백 파운드를 합쳐 연간 9백 파운드를 벌어들이는 고소득자가 되어 에딘버러로 주거를 옮겼다. 스미스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공부에만 열중했는데, 말년에는 어머니와 사촌누이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1784년 어머니가 죽고 4년 뒤에는 사촌누이 미스 더글러스마저 세상을 떠나 스미스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점차 허약해졌다.
1787년 겨울, 그는 모교인 글래스고대학 총장에 선임되어 마지막 행복을 누리기도 했지만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1790년 7월 마침내 67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그가 눈을 감은 에딘버러의 집은 오늘날까지 '아담 스미스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아담 스미스의 인간적 면모는 매우 특이한 데가 있다. 그는 자기의 귀중한 장서를 자랑하면서 "나는 이 책들의 애인일 따름이다."고 한 적이 있는데 사실이었다. 물론 스미스는 젊은 시절 어떤 아름다운 여성과 결실을 맺지 못한 사랑 때문에 아픔을 겪기도 했고, 파리 귀부인들의 살롱에 드나들 때 몇몇 여인들의 사랑을 받은 적도 있지만 결국 결혼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독서와 집필에만 몰두했는데 외견상 지성적인 풍모를 지니지는 않았다. 두툼한 아랫입술과 큼직한 매부리코, 부리부리하게 튀어나온 눈, 약간 구부정하고 우물쭈물한 걸음걸이, 초상화에 나타난 스미스의 외모는 이런 것이다. 겉모양만 그런 것이 아니라 행동까지도 별난 데가 있었다.
로버트 헤일브로너라는 학자는 <위대한 경제학자들>(The Worldly Philosopher)이라는 책에서 아담 스미스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정신 나간 사람으로 유명했다. 스미스가 60세에 가까웠던 1780년경 에딘버러 주민들은 엷은 색 상의와 무릎까지 오는 바지를 입고 흰색 비단 양말에 장식이 달린 구두를 신은 유명한 시민을 규칙적으로 보았을 것이다. 챙이 넓고 얇은 정장용 모자에 단장을 짚고 허공을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하는 양 입술을 움직이며 걸어가는 것이다.
그의 걸음걸이를 두고 어떤 친구는 지렁이가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어떤 때는 잠옷만 입고 정원을 거닐다가 그만 명상에 빠져 정신이 들 때까지 몇 마일이나 걸어가기도 했다. 또 한 번은 어떤 지위 높은 친구와 에딘버러 거리를 거닐고 있는데 경비원이 창을 들어 경례를 했다. 스미스는 전에도 이런 경례를 많이 받아 보았는데도 마치 최면술에 걸리기라도 한 듯 자기의 지팡이를 들어 답례를 하고서는, 그 경비원을 뒤따라 다니면서 경비원이 창으로 하는 짓을 일일이 흉내 내어 친구를 놀라게 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친구보다 훨씬 앞에 서서 단장을 번쩍 들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가 이상한 짓을 한 것을 알 리 없는 그는 단장을 내리고 하던 이야기의 끝을 이어갔다.
그러나 스미스는 결코 괴짜가 아니었다. 그는 매우 진지하고 성실하며 온화하고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이성의 시대를 대표하는 사상가로서 손색없는 인품을 지닌 학자였다. 1764년 귀공자의 가정교사로서 프랑스 여행을 떠나기 전 마지막 강의 시간에 있었던 일은 그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스미스는 강의를 마친 후 고별사를 하면서 청강생들에게 수강료를 되돌려 주었다. 강의를 중간에 마치는 데 따른 조치였다. 학생들은 이것을 단호히 거절하면서 이미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가르침을 받았노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학생들의 마음을 충분히 알고 감명을 받았지만 내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니까 나를 괴롭게 하지 말기 바랍니다." 스미스는 학생들의 호주머니에 수강료를 억지로 밀어 넣었고 학생들은 쓸데없이 선생님을 괴롭히지 않으려면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의 태도였다. 1790년 6월 건강이 극도로 나빠졌을 때 스미스는 병문안을 온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일은 정말이지 조금밖에 없어. 더 많이 일했어야 했는데 말이야. 내 서류 속에는 굉장히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료가 있지만 이제 아무 소용이 없네." 그는 자신이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친구들에게 자기가 죽으면 미완성 원고와 자료를 태워 버리라고 부탁했다. 친구들은 스미스의 당부가 워낙 진지하고 간절했기 때문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어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하여 그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스미스는 죽음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친구에게 자기가 보는 데서 그것을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스미스가 가지고 있던 10여권의 노트는 한 줌의 재가 되었고, 그는 그제야 안도의 빛을 보였다. 스미스는 1790년 7월 7일 약 3천 권의 장서와 약간의 재산을 남긴 채 영원히 눈을 감았다.
아담 스미스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은 그렇지 않았다. <국부론>은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어 등 세계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스미스 사후 20여 년간 발췌본, 번역본을 합쳐 약 60종이나 출판되었다. 그의 사상은 인류의 귀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박물관의 창고에 갇혀 있지 않았다. 조화론적 세계관을 정립하고서도 조화롭지 않은 현실사회의 계급투쟁을 직시한 그의 사상은 제자들에게 계승되면서 적대적인 두 갈래의 사상으로 분열되었다. 모두 아담 스미스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두 진영의 사상가들을 공히 스승의 사상 가운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냉정하게 배격해 버렸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아담 스미스는 나라의 부를 "그 사회의 모든 국민이 해마다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의 양"으로 규정하고 그 부의 원천이 "국민들의 연간 노동"이라고 했다. 이것은 이른바 노동가치론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설명이다. 스미스는 <국부론> 제1편에서 "세상의 모든 부의 가치는 근본적으로 금이나 은에 의해서가 아니라 노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고, 어떤 상품이 가치를 지니려면 그것이 반드시 인간 노동의 산물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데 투입된 노동량에 의해 규정된다."고 했다. 다음은 노동가치론의 단초를 제공한 <국부론>의 유명한 문장이다.
사냥꾼의 세계에서 만약 물개 한 마리를 잡는 데 필요한 노동이 사슴 한 마리를 잡는 데 필요한 노동의 두 배라면, 한 마리의 물개는 당연히 두 마리의 사슴과 교환되고 그만한 가치가 있어야 한다. 이틀 또는 두 시간의 노동은 당연히 하루 또는 한 시간의 노동생산물의 두 배 값어치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같은 원리는 자본가나 지주가 없는 미개한 사회상태에서만 타당하다는 이유로 노동가치론을 포기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는 기계설비 같은 생산의 조건이 다르면 같은 양의 노동에 의해서도 생산물의 양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은 리카도를 거쳐 마르크스에게 계승되면서 자본가계급을 타도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으로 발전한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가치의 원천과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론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가 자유방임시장에 대한 외부의 간섭이 '자연적 자유의 질서'를 해친다고 말했을 때, 그 말은 자유시장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거래, 즉 교환은 그것이 강압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교환의 두 당사자가 모두 이익을 얻을 때에만 성립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스미스 자신은 서로 다른 상품이 교환될 수 있는 이유를 두 상품 사이의 공통점, 즉 그것이 인간 노동의 산물이라는 데서 찾으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스미스가 세상을 떠난 후 나타난 그의 제자들은 스미스의 노동가치론은 완전히 배격하고 스미스의 사상에서 서로 다른 상품 사이의 교환은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공통점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상품은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성질, 즉 효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이것을 근거로 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영원히 번영하는 최상의 질서임을 확신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스미스의 사상에서 각자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만을 계승한 두 진영의 경제학자들은 서로 '부르주아계급의 앞잡이' 또는 '과학자가 아닌 증오의 전령사'라는 비난을 퍼부어댔다. 우리는 뒤에서 그 두 진영의 중요한 사상가들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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